내 대학시절 은사는, 교수가 아닌 써클 1년 선배였다.
그는 법대선배였는데, 이른바 천재형 좌파였다. 글쎄. 천재란 시대에 따라 기준이 변하는 일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접한 수 많은 인물 중 그만을 꼬집어 '절대천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기준은 바로 '원전 독해능력'. 그는 당시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진 '헤겔' '맑스' '알튀세르' 그리고 '라캉'과 '그람시'의 저작들을 마치 국정 국어교과서 읽듯이 술술 읽어나갔던 위인이다.
나 같은 둔재로서는 입이 떡 벌어질만한 일이었고, 어떤 절망감 같은 감정을 느껴야 했다. 맑스의 짧은 수고 한편 읽는 것이 무슨 2차대전 암호문을 해독하는 것 처럼 어려웠던 나에게, 그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세미나 시간, 내 동기들의 내공은 단 10여분 만에 소진됐고 나머지 1시간은 그의 강의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갑자기 그가 떠오른 이유는, 파리 안내 책자에서 파리의 페르 라 셰즈 공원묘지를 발견했고 거기에 '1871 파리 꼬뮌 병사의 벽' 이란 존재를 오랜만에 떠올리고 나서다.
'꽃민' 그는 꼬뮌이란 프랑스 어를, 한국어로 꽃민으로 불렀다. 이른바 꼬뮌주의자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당시에 그가 말하는 꼬뮌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71 파리 꼬뮌에 대해서도 당시에 어렴풋이 책을 통해 접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나의 공부는 얇았고 어설펐다. 물론 당시에 이해 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이라고 이해할 리는 만무하다.

런던과 마찬가지로 파리 역시, 오래된 도시 답게 도심에 커다란 공원묘지가 마련돼 있었다. (물론 지금은 파리사람들이 죽어서 이 공원묘지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만원을 이라 한다. 아니 들어갈 수 있다면 대단한 영광이라고 한다) 파리의 동서남북에 공동묘지가 공원처럼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마르뜨, 페르 라 쉐즈, 그리고 남쪽의 OOOO등... 놀라운 점은 과거 파리를 대표했던 문학자 영화감독, 음악가들의 묘지를 바로 가까이서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파리 라 쉐즈에만 해도 쇼팽, 오스카 와일드, 마리아 칼라스, 아뽈리네르, 알퐁스 도데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예술가들이 다수 잠들어 있었다.



시간이 남아 장미꽃 2송이와 1송이 카네이션을 사들고 '페르 라 쉐즈'에 도착하다. 꽃이 생각보다 비쌌다. 세 송이에 만원이 넘었을까. 장미는 꼬뮌병사의 벽을 위해, 나머지 한송이는 '도어즈'의 짐 모리슨을 위해 샀다. 짐 모리슨이 어째서 파리에 잠들어 있는 지 알지 못했지만 왠지 도어즈--라고 하니 파리가 달리 보였다.




그림으로만 접했던 '1871 파리 꼬뮌 병사의 벽'과 힘겹게 조우하다. 지금도 벽에는 수 많은 장미꽃들이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다. 벽 너머에는 평범한 파리 시내가 펼쳐지고 있었고, 담쟁이 넝쿨은 무심히도 아주 평범한 담장을 감싸안고 있었다.
1871년 단 3개월 간의 파리꼬뮌, 그리고 3만여명의 희생자. 민주주의란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기분이 맑아졌다. 파리 꼬뮌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후세 사람들에게 주었는지--- (물론 거기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쉽지만) 그리고 그 영향력이 나 같은 미천한 놈에게 까지 미쳤던 경로를 생각하니 감개 무량해 졌다.
때론 무덤이나 묘지도 힘이 된다. 서울에도 공원묘지가 빨리 들어서야 한다. 죽은자와 함께 사는 것이 원래 당연한 섭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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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는 소음에 날 한 참 동안 째려(?) 보던(갈군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 파리 여고생(몽파르나스 묘지의 한 문학가의 묘 앞에서 책을 읽던 여학생이었음)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
맞다. 가장 큰 공원묘지가 몽파르나스였지. 역시 한번 다녀오니 지명이 기억이 안난다. 몽파르나스. 오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