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교조 : 전국교직원노동조합(全國敎職員勞動組合, 약칭 전교조)은 1989년 5월 28일 창립된 유치, 초등, 중등 교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진보적 성격의 노동조합이다. 전국교사협의회(1987년 9월 27일 설립, 약칭 전교협)가 그 전신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주요 가맹 단체이다. 1999년 1월 6일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합법화되었고, 해직교사들도 복직되었다. 설립 기치는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이다.(윜ㅣ피디아)
오늘은 매우 슬픈 날이다.
이 개명된 천지에, 교육자라는 탈을 쓴 행정가들이, 겨우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에게,
이토록 잔인한 칼날을 휘두를 수 있다니...끔찍하다
단지 역사는 반복된다고 뒷짐지고 한숨 쉴 여유도 없다.
희극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비극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몰염치하다.
전쟁을 벌이려고 하면 적어도 선전포고는 하고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건 마치 낙양성을 차지한 동탁, 아니 그 졸개들 보다 더 졸렬하다.
전사자에 대한 슬픔이라도 제대로 느낄 여유도 없이
이따위로 생겨먹은 삼류 쓰레기들과 한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다는 분노가 치민다.
1989년을 기억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일이니 어느새 20년 가까이 훌쩍 지난 얘기다.
1989년은 한국 교육사에 격동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전교조가 결성됐고 수많은 선생님들이 학교를 떠나야 했다.
내가 다니던 시골의 한 중학교에서도 7명의 교사가 전교조에 가입했다.
당시 나이 30대 젊은 선생님들이었다.
이 가운데 나를 가르친 선생님은 5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 분들은 학생들이 어리다고 생각했는지 수업 시간에 '전교조'에 대한 얘기를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세상은 요동쳤고 7분의 선생님들은 그 격량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마도 2학기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교육부의 최종 통보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해임이라는 것이다.
7분의 선생님들은 밤새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분들 역시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7분을 대표해서 한 분만이 전교조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머지 6분은 월급을 모아서 그 분을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후원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부분 30대 초반의 10년차 미만의 교사들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 같은 결정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결단을 내린 분이 '연탄'의 시인 안도현 작가다.
당시 그는 29살이었다.
당시 그는 담임이 아니라 중 2학년 5-6-7반 국어 감당을 맡고 있었다.
당연히 5-6-7반 학생들이 먼저 분노했다.
이들은 오전 9시 수업에 참가하지 않고 운동장으로 집결했다.
당시 중학생들도 1987년을 겪었기 때문에 어떻게 시위를 해야 하는 지 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생각으론 매우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침묵시위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나는 1층에 자리한 2반 부반장을 맡고 있었다.
안 선생님이 우리반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물끄러미,
혹은 죄송한 마음으로 이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교무실의 선생님들도 선뜻 이들을 말리지 못했다.
아마도 전교조 7분 선생님들의 시선이 불편했을 것이다.
9시10분 교장선생님이 교문을 지나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교장선생님은 이들의 모습이 통상적인 조회의 모습이라고 착각을 했나보다.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냥 들어갔다.
5분 뒤 사태를 파악하신 교장선생님이 교감선생님과 운동장으로 뛰쳐나왔다.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은 약 100여명.
교장 선생님은 별 것도 아닌 것 처럼 한 아이의 팔을 붙잡고
"야,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해! 들어가서 수업해야지"하고 다그쳤다.
그러나 그 아이는 교장선생님의 팔을 뿌리쳤다.
난 바로 앞 창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흔들리는 눈빛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는 곧장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 같던 교장선생님의 지시사항과 스스로의 의지와의 충돌을 견뎌내기엔
아직 그는 너무 어렸다.
이어 일제히 아이들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 안도현 선생님 학교에서 내보내지 마세요."
교장과 교감 선생님 모두 당황했다.
이어 몇 번 소리를 치더니 결국 교무실로 들어갔고
곧 교무실에서 대다수의 선생님들이 운동장으로 튀어나왔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몽둥이에 쫓겨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
일부 학생들은 운동장 주위로 피해 시위를 계속하기도 했지만 금새 진압당했다.
당시 문학반 소속으로 안도현 선생님과 교류를 유지하던 나는 까닭모를 슬픔과 어지러움을 느껴야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때의 감정이 제대로 기억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기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스스로 그 상황이 싫어서 억지로 기억을 지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두어번 친구들과 함께 안도현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다.
한 번은 시내 전교조 사무실이었고, 또 한번은 원광대학교 교정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주 반갑게 우리들을 맞아주셨다.
해직된 교사와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만남이라.
전교조 사무실은 빨알간색 투쟁 구호로 꽉 차 있었기에 어린 학생들은 주눅이 들었지만
선생님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만났던 기억이 난다.
난 당시 안 선생님을 단순하게 기쁜 감정으로만 만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리지역에는 대여섯 분의 선생님이 해직이 됐다.
그런데 N고등학교에서도 한 분이 해직을 당하셨는데,
당시 이 학교의 교감선생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머랄까 나는 까닭 모르게 내가 가해자 같다는 생각을 했고,
원광대학교에서의 불편한 만남 이후 영영 그 분을 볼 수 없게 됐다.
이후 내 친한 친구들은 소설가도 된 백가흠을 앞세워 완산 모악산에 터를 잡았던 그를 종종 방문했었다.
나를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국가가 학생들에게 가한 트라우마인 셈이다.
각설하고, 갑자기 국가가 나서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끊어 버렸다.
이런 폭력을 당한 스승과 제자의 고통은 어린이들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큰 슬픔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군-사-부 일체를 미덕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뒤에서 선생님을 죽도롯 미워하고 욕을 하긴 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나를 존중하는 스승에게는 평생 고마움을 갖고 살아간다.
그게 우리가 배운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고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였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국가라지만 이 같은 도덕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 선생이 X같고 못가르치는 X새끼라도,
선생과 학생의 정을 떼기 위해서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켜져야 한다.
국가가 도덕을 내팽개쳤다.
'경쟁의 원칙을 위배했다'는 얼토당토 없는 이유만을 남기고 세상의 도를 저버린 것이다.
1989년은 이미 20년 전의 일이니, 처음 있었던 일이니, 상처가 꽤 아물었으니, 넘어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시 이 같은 일을 벌였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슬픔을 느낀다.
과연 상처받은 초등학생의 마음을 누가 치유해 줄 것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바로 너 사기 교육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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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올해의 인물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다.
올해의 단어는 바로 탐욕이다.
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우리 안의 괴물을 불러 내 버렸다.
과연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러야만이 2008년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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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hyun의 생각
Tracked from goodhyun's me2DAY 2008/12/17 22:02
[기억] 1989년의 반복, 몰염치에 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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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엉의 생각
Tracked from oldtype's me2DAY 2008/12/18 12:49
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우리 안의 괴물을 불러 내 버렸다. 어린 나이에 충격받은 아이들이 불쌍하다. 왜 이런 나쁜 역사가 반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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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힘내세요!
Tracked from 억만가지 记忆 2008/12/19 13:42
대량의 전교조 해직 사건을 겪은 89년에 나는 아직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2학년이었고 내 주변엔 이유없이 가정방문을 하고 이유없이 국민체조 자세가 불량하다고 화를 내며 분풀이를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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