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녕성 여행 5일차


심양, 고궁에 감동 박물관에 절망



아침일찍 눈이 저절로 떠졌다.

밤에 무리를 한 것도 없는데 추워서 그런지 몸이 불편하다.

이 민박집은 난방은 커녕 온수도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공되는 식사 또한 형편 없었다.


아침 밥을 먹고 나니 좀 부족한 생각이 들어

부억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분노가 폭발했다.

그 곳에는 나에게 주지 않은 감자 반찬이 있었던 것. (아 천하의 호자이가 먹는 것으로 삐지다니-_-)

나에게는 나물반찬만 건냈으니, 분명 가족끼리 먹으려고 준비한 반찬 같았다.

꽤심했다. -_-


결국 예정보다 일찍 (심양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주인에게 기차표 예매를 부탁하다.



무조건 고궁을 가기로 마음을 먹다.

고궁은 선양 동쪽에 있었다.

그 전에 서탑지역을 돌아봐야 한다.

날이 춥다. 전에 눈이 왔는지 거리곳곳에 눈 투성이다.

오늘도 날씨가 심상치 않다.



서탑은 중국 전통에서 봤을 때는 매우 이질적인 탑이다.

아마도, 아니 확연하게 티벳불교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청나라는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가다.

원나라는 일찍이 티벳불교를 받아들여 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만주국의 수도에 와보니 그 영향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형식의 탑이 우리나라엔 전파되지 않았냐는 거다

의아했지만 패스. 일단 서탑지역이기 때문에 한국인 상가가 많아 보였다.


택시를 타고 고궁으로 이동했다.

선양 중심가를 가로질러 택시가 이동한다.

이번 여행에서 택시를 확연하게 적게 타긴 했다.

놀란점은 택시의 수준들이 다 높아졌다.

출발을 알리는 영어가 흘러나온다던지, 친절도가 높아진것은 사실인 듯 싶다.


이리저리 돌던 택시가 구공에 도착했다.

적색 벽이 한눈에 이 곳이 중국 궁전임을 알게 했다.

중국 왕성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벽이 높다는 것이다.



왜그럴까?


단순한 추론은 이 곳이나 베이징 모두 산이 없는 완전 평원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 달음에 달려온 기마군단이 성에 도착했을 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자?


물론 문화적으로 일본은 담이 낮고 중국은 높다는 것은 워낙 유명한 사례긴 한데,

어찌됐건 세상과 완전 괴리시킨 높은 담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왜 붉은색이었을까?

만주족들이 처음 이 성을 만들 때부터 붉은색이었을까?


확실하게 거대해 보이는 심양고궁의 망루.

그러나 보기와 달리 고궁 자체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창경궁만 할까?


확실한 것은 심양구공의 규모가 조선의 궁전보다는 작다는 것이다.


경복궁의 규모는 확실하게 심양의 그것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다.

조선초기 조선의 국력이 먼주보다 절대 낮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실제 만주는 조선초기 조선에게 조공했고 철저하게 동생임을 자처했다.

보듬어 안아 달라는 얘기다.


심양구공은 베이징의 자금성을 상당부분 빼다 박았다.

설계시 그 곳을 참고했을 수도 있고,

이후에 청황제들이 자주 이 심양성을 오갔음으로 그에 맞춰 개축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명나라의 영향을 안받을 수 없었으리라.



심양구공의 특징은 바로 넓디 넓은 연병장(?)의 존재다.


바로 적잖은 만주족 부족장들의 거처이자 동시에,

청나라 최강의 군조직인 8기군이 태어나 자리잡은 바로 그 장소다.

과거에는 지방의 왕들이 이곳에서 집무를 보던 곳이라고 했다.

만주라는 나라가 여러 부족들의 연합왕국이라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했다.

오십위엔.

우리돈으로 1만2000원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다.

가격을 보는 순간 욕이 나왔다.

아무리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해서 관리비용이 적지 않다지만

이렇게 높은 비용은 관광객들에게 적잖은 부담이 된다.

와우.

물론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왕의 집무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니 이건 좀 심하다.

왕은 좀 뒤에 앉아 있어야 정상 아닌가?


전시된 팔기군의 무기들.

다양한 무기 가운데 활이 으뜸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여진족은 '주몽'의 후예를 자처하는 나라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부여를 거쳐온 만죽국의 역사는 발해에 이르러 꽃을 피웠고,

다시 금나라와 후금, 청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와는 피를 나눈 사촌인 셈이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미스테리적인 관계.



여진족의 자랑인 8기군 역사와 무기를 구경하는 중국인들.

물론 중국인들은 청나라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자국의 역사로 기억한다.

청나라를 우리와 전혀 무관한 역사로 알고 있는 한국과의 차이다.


바로 만주가 현재 중국에 속해 있기 때문일까?



청나라 황제들은 이 심양고궁을 여름별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강희제는 이 곳에서 사고전서를 완성했다고 한다.


뒤에는 후원과 왕후와 후궁들의 거처, 그리고 왕의 서재들이 차례노 놓여 있었다.

돌아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십여분이면 한바퀴 휭하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아담한 규모.

그럼에도 우리가 이 왕궁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강희제의 사고전서 비에 있다.


1700년대 전 세계 최강국이자, 세계 최대의 제국을 완성했던 청나라.

그리고 지식으로도 세계 최고의 백과사전을 완성한 이가 바로 강희제다.

그런 황제의 집무실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은 참으로 가슴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 이후일터인데,

그 전성기를 지나자 마자 제국의 특성상 그대로 몰락하고 만다.

이 점은 제국의 동력이 지나치게 황제에 집중돼어 있다거나,

혹은 국가적인 지식인들의 힘이 왜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했는 것을 시사한다.


솔직히 잘 모르겠음.


중국은 너무 닫혀있는 나라이면서도 자체로 충분하게 열린 나라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점이 장점이자 한계일 수 있다.



거리를 지나다가 한 컷.

외국인들은 항상 이런 지저분한 풍경만을 강하게 기억에 남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궁을 나오다.

고궁관광은 한 시간이면 충분한 규모다.

2시간 정도 머물렀다


고궁 주위는 우리 인사동처럼 골동품과 청나라 시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 상업지구에 들어가다.

광고판에 예전 만주 군벌이 위치했던 역사박물관 광고가 눈에 띄었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나 일정상 패스하다.



우리의 남대문 격인 심양성 입구에 가보기로 했다.

높았다.

시장을 가로질러 도성입구에 도착하니 가슴이 뿌듯하다.

예전 수많은 조선인들이 가로질렀던 문이다.

심양의 대문.

이 문을 지나고 나니 문득 봄 기운이 느껴진다.

심양의 도심도 점차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눈을 치우는 시민들...

날이 풀렸다지만 3월초의 기온은 영하 2~3도를 가리켰다.



 "심양에 가면 박물관에 가야지!!"


요녕성 자체에 무지하던 나를 일깨운 분은 한 미술사학자였다.

그는 실제로 심양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딴 분이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왜 요녕성에서 공부했냐?"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명쾌했다.


"중국 고미술의 중심은 북경하고 요녕성 심양이에요.

왜냐구요?

청나라 수도였잖아요.

실제 중국 고미술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심양이죠.

 문화적 전통도 상당하고 지금도 중국 고미술의 수도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심양입니다.

때문에 심양에 가게 되면 무조건 박물관에 가봐야 합니다."


그래서 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시타에서 박물관으로 걸어가기로 했는데,

불과 2km의 길을 가는데 꼬박 3시간이 걸렸다.

일단 길을 잃었는데,

4~5명의 심양 시민들은 나의 "보우관(박물관) 어떻게 가요?"란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다




박물관은 이렇게 생겼다.

규모가 어마어마 했다.

놀라운 점은 이 거대한 박물관이 공짜라는 것.

물론 올림픽 이전에는 20위안의 돈을 받았지만 최근에는 공짜라는 것.


중국의 자부심과 국민들에 대한 서비스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중국여행에서 느낀 가장 인상적인 표식

바로 남자 화장실을 가리킨다.


아, 이 얼마나 엽기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가.

나 역시 이번 여행에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 피울 정도였다


요하문화 특별전에 눈에 들어온다.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점에서 눈에 거슬린다.

발해를 도독부라고 칭한 점이나,

고구려나 부여까지도 싹뚝 자기 역사로 칭한 점이 억울했다.



최근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홍산문화'

요녕성 박물관은 홍산문화 홍보의 중심을 이룬다.

과거 이를 부정하던 중국은 점차 홍산문화 역시 중국 문화의 거대한 줄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물론 한국 연구자들은 홍산문화를 고조선 문화의 원류이자

유목민 문화의 초기 중심문화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요라는 땅이 과연 독립적인 문명인가?

혹은 중국과 유목민 문화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고 있을까?

그리고 한국에 끼친 영향은?



당나라 시대를 요녕 지역(요서+요동)을 설명한 지도.


안동도호부와 발해도독부가 보인다.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부라는 얘기다.


분노가 치민다.

물론 역사적으로 발해가 당의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발해라는 정체성 까지 무시하는 처사는 도대체 무슨 심뽀일까?



고구려 관도 눈에 띈다.

꽤 크고 근사하게 해놨다.

집안지역에서 발견된 무덤의 벽화까지 재연하는 노력을 보였다.


물론 중국 역사라는 관점에서 서술한 것은 물론이다.



부여도 등장한다.

부여에 대한 평가는 꽤 후하다.

중국 변방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국가라는 식이다.


이 밖에도 고조선도 등장한다.



가장 황당한 지역 역사 서술은


후한시대, 그러니까 조조-손권-유비가 활거하던 삼국지 시대의 지도다.


공손찬이라는 인물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바로 이 공손찬의 강역이 바로 이 요녕성은 물론이고

평양을 포함한 한반도 상당수라는 얘기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도) 듣도 보던 못한 얘기다.



한 선배의 초청으로 낯선 저녁 식사자리에 동석하다.

부리나케 달려가서 보니 그 자리엔 요녕성 소속 공무원들이 두명이나 나와있었다.

요상하게 이번 여행에선 중국 공무원을을 많이 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군 출신인 이들은 한국과 일종의 끈을 갖고 있었고,

한국어도 할 줄 알아 자연스럽게 대화가 됐다.


특별한 내용이 오가진 않았지만 소소한 대화 속에 중국인들이

한국과 북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리가 됐다.



이들과 헤어지고 부리나케 야밤에 NHN 심양지사로 향하다.

그 곳에는 NHN 친구가 소개해준 심양에서의 마지막 조선족 후배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 역시도 연변과기대 출신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두 명의 조선족 젊은이가 모두 연변과기대 출신이란 점에

일종의 감동을 받았다.


이 친구는 심양 출신으로 호기심에 연변으로 대학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개발자가 돼서

첫 직장은 상하이에서 그리고 여기 고향에서의 NHN이 두 번째라고 한다.


"어릴적부터 심양에서 살았는데, 철강의 도시였던 심양이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심양이 요녕의 중심인 것은 확실하고, 동북3성의 최대 관문 도시가 될 것도 분명해요.

NHN이 이 곳에 거점을 만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와의 만남은 매우 짧았다.

하지만 심양에 대한 정보량에서는 가장 많았던 듯 싶다.


역시 스쳐지나가는 사람과 이 곳에서 성장한 사람이 주는 정보의 질은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심양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저녁 늦게 민박집에 들어오니


조선족 가족들이 마작놀이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다.

여전히 춥고,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 춥다.


Posted by hoj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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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홍선생 2009/04/05 09:08  Modify/Delete  Reply  Address

    라마교 계열의 탑이 전래 되지 않은 것은...
    제 추측인데....
    청이 융성하던 조선조에 불교 자체가 조선에서는 배척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또 조선에서도 청조 자체를 내면적으로 업수이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니 청조가 숭상하던 라마교가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고미숙 선생의 '열하일기'를 (조선배도 일익한) 한번 들추어 보시면 박지원이 열하에서 지체 높은 라마승려를 만나서 갈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황제가 떠받드는 승려인지라 역시 '모셔야'하는데 조선의 사대부가 '승려'에게 굽실 거릴 수 도 없고...

    • hojai 2009/04/05 21:41  Modify/Delete  Address

      아. 그렇군요. 시기적으로 운때가 안맞았군요. 그럼에도 원나라도 라마교가 흥했는데,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도 그리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흠. 워낙 조계종, 천태종 파워가 쎄서 그런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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