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마지막 신천지의 한국인들

부지불식간에 광동성과 우리와의 교역액은 205억 달러로 이는 우리의 4대 교역국인 독일과의 교역액보다 많다. 또 우리나라의 대 광동성 수출액(160억 달러)은 우리의 3대 수출대상국인 일본 다음 순서고, 광동성과의 무역흑자는 우리나라의 제3대 무역흑자 대상국인 미국보다 많을 정도. 광동성을 빼고 한국의 경제를 논하기 힘들 정도가 된 것이다.
“광동인들은 천성적으로 부지런 합니다. ‘要發財, 忙起來(돈을 벌기 위해서는 항상 바빠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홍콩 건설의 주역들이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한 행동이 한국인과 많이 비슷하죠.”
<광저우 중심의 최고층 빌딩.>
년 전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한 조승현(32)씨는 결혼이후 광저우에 정착해 살면서 소규모 무역업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광저우에서의 삶을 꽤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크게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꿈과 희망을 갖기에 충분한 환경이라는 것.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에 발맞춰 한인 사회의 폭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때문에, 중국 각지에서 활동했던 한인들도 점차 광저우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아직은 한인의 숫자가 많지 않고 산업 경쟁력이 높아 장기거주에 이롭다는 평가 때문이다. 이 지역은 광동어를 사용해서 애당초 북경어(보통어)를 배웠던 한인들에게는 언어적 장벽이 존재했지만 90년대 이후 꾸준하게 보통어 사용이 증가했고, 더구나 홍콩과 인접해 있어 영어사용 인구도 중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광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코치해준 조승O 사장. 광저우 교민의 초창기 멤버다. 한때 방송일을 했기 때문인지 언론의 생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놓을 수 없는 점은 뛰어난 교육 인프라. 바로 화남지역 최고의 명문대학인 중산대학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명문대학 인근에서 젊은 유학생들이 수백 명씩 살고 있는 것은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이 대학은 도시의 역사와 함께 한 듯 고색창연해 보였다. 이름부터 예사스럽지 않다. 대학의 입구에는 이 같은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세계에 위대한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위대한 사람이 세운 대학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이 위대한 사람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손문(호는 中山)"선생이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아편전쟁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손문과 19C후반의 중국의 상황에 대해 대략적인 이해가 있을 것이다.
손문은 바로 이곳 광저우 출신이다. 광저우에서 남쪽으로 30km를 가면 중산현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이 손문의 고향이다. 홍콩과 마카오에서 의사로 활약하기도 한 그는 1912년 중화민국을 세웠고, 이후 그가 죽던 해인 26년까지 14년간 군벌세력과 치열한 내전을 치러낸 인물이다. 힘겨운 외세와의 투쟁을 위해 공산당과 손을 잡았던 그는 말년에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 광저우에 대학을 세우고 직접 삼민주의를 실천해 옮겼다.
현재 이 대학은 MBA나 IT관련 분야에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며 광동성 경제발전의 허브 역할을 해내고 있다. 현재 중국 종합대학 순위는 10위권. 홍콩과 가까워 중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교수진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또 한가지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 대학이 우리역사와 동떨어진 대학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로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 선생은 1926년~·27년 사이에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시 광동성은 서구 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였고 자연스레 혁명적 분위기가 충만했다고 한다. 때문에 한국 독립지사들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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